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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 신화 | 오디세이 트로이 헬레네 파리스 메넬라오스 관계 결말 정리
트로이 성벽 위에 노인 하나가 젊은 여인을 자기 옆자리로 부릅니다. 늙은 왕 프리아모스이고, 옆에 앉은 여인이 헬레네예요. 성 아래 들판에는 그리스 군대가 진을 치고 있고, 프리아모스는 저 아래 유난히 크고 위엄 있어 보이는 장수가 누구인지 헬레네에게 물어봅니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건, 몇 년째 이어진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여인이 정작 적장의 얼굴도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하는 처지로 등장한다는 점이에요. 헬레네는 이 전쟁의 이유이면서 동시에 이 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러나 가장 무력하게 지켜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벽 위에서 적장의 이름을 하나씩 짚어주다
헬레네는 먼저 아가멤논을 가리킵니다. 훌륭한 왕이자 용맹한 군인이라고 소개하면서, 남편 메넬라오스의 형이라는 관계도 함께 짚어줘요. 아가멤논 신화에서 이 인물이 나중에 어떤 죽음을 맞는지 더 자세히 다뤘습니다.
키는 작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를 프리아모스가 다시 묻자, 헬레네는 라에르테스의 아들이자 꾀가 많기로 소문난 오디세우스라고 답합니다. 곁에 있던 트로이의 원로 안테노르가 한마디를 보태요. 예전에 오디세우스가 헬레네 문제로 메넬라오스와 함께 트로이에 사절로 왔을 때를 직접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안테노르가 기억하는 건 두 가지인데, 서로 다른 순간의 이야기예요. 하나는 두 사절의 겉모습입니다. 트로이 사람들 앞에 나란히 서 있을 때는 메넬라오스 쪽이 어깨가 더 벌어져 당당해 보였는데, 두 사람이 자리에 앉고 나자 오디세우스 쪽이 훨씬 왕다운 위엄을 풍겼다는 거예요.
다른 하나는 오디세우스가 일어나 말을 시작했을 때의 인상입니다.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든 지팡이도 앞뒤로 움직이지 않아 처음에는 어수룩해 보였는데, 막상 입을 열자 겨울 눈보라처럼 말이 쏟아져 아무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는 기억이었어요.
거인처럼 머리와 어깨가 다른 사람들 위로 솟아 있는 장수도 눈에 띕니다. 헬레네는 그를 아이아스라고, 그리스군의 방벽 같은 존재라고 설명해요.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두 오라비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였어요. 헬레네는 두 사람이 고향 라케다이몬에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 때문에 생긴 이 일이 부끄러워 전쟁에 나서지 않은 건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넘어갑니다.
자신이 이곳에 없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말
장수들을 가리키는 사이사이, 헬레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차라리 이곳에 오기 전에 죽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그러면 딸도, 자기 방도, 어린 시절을 함께한 사람들도 이렇게 두고 오지 않았을 거라고 말해요.
전쟁을 부른 여인이라는 꼬리표와, 정작 그 전쟁 한복판에서 자기 딸과 옛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처지가 같은 장면 안에 나란히 놓여 있는 셈입니다.
파리스가 스파르타로 가기까지, 트로이 바깥에서 이미 정해진 일
헬레네가 왜 트로이에 있는지는 일리아스 본문이 처음부터 설명해 주지 않아요. 이야기는 이미 전쟁 10년째, 헬레네가 트로이에 도착한 지 한참 지난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그 앞의 사정은 다른 신화 자료가 채워줘요. 여신들 사이의 다툼 끝에 파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뽑는 심판을 맡게 됐고, 아프로디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며 자신을 선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 파리스가 배를 타고 향한 곳이 헬레네가 살던 스파르타였어요.
즉 헬레네 본인이 무언가를 결정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신들 사이의 약속이 먼저 있었고 그 결과로 파리스가 그녀를 찾아온 순서라는 점이 이 신화의 출발점입니다. 파리스가 애초에 그 심판대에 서게 된 사정은 파리스 신화에서 따로 정리했습니다.
성벽 위 장면이 끝난 뒤, 결투와 그 이후
헬레네가 장수들을 가리키는 장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일대일 결투예요. 헬레네를 두고 둘이 직접 겨루어 전쟁을 끝내자는 약속이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몰아붙여 투구 끈을 잡고 질질 끌고 갈 정도로 우세했어요. 그런데 여신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어 파리스를 구해내고, 그를 안개로 감싸 그대로 그의 방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이어 헬레네를 그 방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헬레네는 처음에 딱 잘라 거절해요. 이제 와서 다시 그의 잠자리를 봐줄 수는 없고, 그랬다가는 트로이의 모든 여자들 입에 오르내릴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가 화를 냅니다. 자기를 자꾸 성나게 하면 지금까지 사랑한 만큼 미워하게 될 거라고, 그러면 너를 네 운명에 내버려 두겠다고 위협해요. 이 말에 겁을 먹은 헬레네는 겉옷을 두르고 말없이 여신을 따라갑니다. 자기 의지로 파리스를 떠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거절했다가 여신의 위협에 못 이겨 끌려간 장면이라는 점이 이 대목의 핵심이에요.
몇 년 뒤, 전쟁이 끝난 스파르타의 결혼 잔치
같은 헬레네가 훨씬 나중, 전쟁이 다 끝난 뒤에는 전혀 다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먼 길을 떠났을 때, 그가 도착한 스파르타 궁전에서 마주친 사람이 바로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였어요.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에게 자기 집이 구혼자들에게 거덜 나고 있다며 아버지에 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이 여정의 다른 갈래는 오디세이아 줄거리 정리에서 더 자세히 이어집니다.
그런데 텔레마코스가 도착한 그날, 궁전은 마침 결혼 잔치가 한창이었어요. 메넬라오스는 딸을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 혼례와, 아들 메가펜테스의 혼례를 동시에 치르고 있었습니다. 딸을 신랑 집안으로 보내는 이 결혼이 아킬레우스 신화 쪽 가문과 다시 이어진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게 있어요. 이날 장가드는 아들 메가펜테스는 헬레네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메넬라오스가 다른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헬레네가 낳은 자식으로 전해지는 건 딸 헤르미오네뿐이에요.
파리스의 방에서 다시 만났던 그 헬레네가, 이제는 메넬라오스와 한집에서 집안 혼례를 치르며 손님을 맞는 안주인으로 앉아 있는 거예요. 호메로스가 전하는 헬레네 이야기의 결말은 바로 이 장면, 스파르타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모습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건을 꺼내 드는 부부
잔치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각자 트로이에서 겪은 일을 손님에게 들려줍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꺼내는 일화는 같은 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점도 상황도 다른 두 사건이고, 그 안에서 헬레네가 놓이는 자리도 정반대예요.
헬레네가 먼저 꺼내는 건 목마가 등장하기 전의 일입니다. 오디세우스가 거지 행색으로 변장하고 제 몸에 상처까지 내어 트로이 성안으로 정탐하러 숨어들었던 때인데, 그를 알아본 건 자신뿐이었다고 말해요.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그를 붙잡고 캐물은 것도 자신이었다고 덧붙입니다.
메넬라오스가 이어서 꺼내는 기억은 그보다 한참 뒤, 전쟁이 끝나던 무렵의 다른 사건입니다. 거대한 목마 안에 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던 밤, 헬레네가 목마 주위를 돌면서 그리스 장수들의 아내 목소리를 하나하나 흉내 냈다는 거예요. 안에 숨은 병사들이 그리운 아내 목소리에 반응해 대답하려는 순간, 오디세우스가 손으로 안티클로스의 입을 틀어막아 겨우 발각을 막았다고 말합니다.
헬레네는 자신을 그리스 편을 도운 인물로 이야기하고, 메넬라오스는 하마터면 그 위장을 무너뜨릴 뻔했던 인물로 이야기하는 셈이에요. 서로 다른 두 사건을 골라 꺼냈는데 그 안에 그려지는 헬레네의 모습이 정반대라, 이 부부 사이에 전쟁의 기억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눈물을 지우는 약, 안주인이 된 헬레네
손님들이 옛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자, 헬레네는 포도주에 슬픔과 근심을 잊게 하는 약을 몰래 타 넣습니다. 이 약을 마시면 그날 하루는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다고 전해져요.
이 약은 이집트의 톤이라는 사람의 아내 폴리담나가 예전에 헬레네에게 준 것이라고 소개됩니다. 트로이의 비극을 함께 겪은 사람들 앞에서, 이제는 그 슬픔을 다스리는 역할까지 맡고 있는 헬레네의 모습이에요.
이 이야기를 어디서 이어가면 좋을까
성벽 위에서 적장의 이름을 하나씩 짚어주던 여인과, 스파르타에서 손님의 술잔에 약을 타는 안주인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이에 놓인 10년을 전쟁 쪽에서 통째로 보고 싶다면 트로이 전쟁 줄거리 정리로 이어가면 돼요.
헬레네가 트로이를 떠나 다시 스파르타에 앉기까지의 과정은 호메로스가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고 건너뜁니다. 그 빈자리를 두고 그녀가 이집트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부터 후대의 영화 각색까지 서로 다른 판본이 여럿 전해져요.
남편 쪽 시선에서 이 부부의 관계를 더 따라가 보고 싶다면 메넬라오스 신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