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
› 신과 인물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헤르메스 신화 | 태어난 날 소를 훔친 이야기부터 오디세우스를 두 번 도운 순간까지

헤르메스 신화 | 태어난 날 소를 훔친 이야기부터 오디세우스를 두 번 도운 순간까지

갓 태어난 아기가 요람을 빠져나와 하루 만에 남의 소 쉰 마리를 훔치고, 그 소를 훔친 상대와 화해까지 끝내버립니다. 이 아기가 바로 헤르메스예요.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이 신은 호메로스 찬가에서는 사고뭉치 갓난아기로, 오디세이아에서는 정반대로 신중한 전령이자 조력자로 등장합니다.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날 벌어진 일

호메로스 찬가 4권은 헤르메스가 아르카디아 킬레네산의 동굴에서 태어난 그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요. 제우스와 님프 마이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요람에 얌전히 누워 있는 대신, 그날 안에 동굴 입구로 기어 나갑니다.

거기서 그는 거북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껍데기만 남기고 죽입니다. 소가죽을 씌우고 갈대 줄기를 꽂은 뒤 양의 창자로 현을 매어, 그 자리에서 세상에 없던 악기인 리라를 만들어냈어요. 만들자마자 그는 자기 부모와 태생에 관한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 장면이 눈에 띄는 이유는 단순한 재주 자랑이 아니에요. 태어난 그날,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이미 도구를 만들고 노래를 짓는 존재라는 걸 보여준 셈이고, 이 리라가 뒤에 벌어질 사건의 핵심 소재가 됩니다.

발자국을 거꾸로 남기며 몰고 간 소 쉰 마리

같은 날 헤르메스는 곧장 피에리아로 향해 아폴론의 소 떼 쉰 마리를 훔칩니다. 그냥 끌고 간 게 아니라, 소들의 발자국을 거꾸로 찍히게 만들고 자신은 위성류와 도금양 가지로 엮은 신발을 신어 자기 발자국 자체를 지웠어요.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었습니다.

소 떼를 알페이오스강까지 몰고 간 그는 그 자리에서 부싯나무를 처음으로 발명해 불을 피웁니다. 그러고는 소 두 마리를 잡아 열두 신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정작 자신은 배가 고팠음에도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어요. 일을 마친 뒤에는 가을바람처럼 조용히 열쇠 구멍을 빠져나가 동트기 전에 다시 요람으로 돌아와 눕습니다.

훔친 소를 감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선택에는 곧 대가가 따릅니다. 아폴론이 사라진 소 떼를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요.

아폴론 앞에서 시치미를 떼다

소를 도둑맞은 사실을 알아챈 아폴론은 흔적을 추적해 결국 헤르메스가 있는 동굴까지 찾아옵니다. 강보에 싸인 채 요람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를 보고도 아폴론은 그가 범인이라 확신하고 다그쳤어요.

헤르메스는 태연하게 잡아뗍니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며, 아무도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고 답하죠. 자기 발은 그렇게 멀리 걸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도 않다고 덧붙이면서, 갓난아기가 소를 훔칠 수 있겠냐고 되묻기까지 합니다.

화가 난 아폴론이 버들가지로 그를 묶으려 하자, 놀랍게도 그 가지들이 저절로 자라나 소들을 뒤덮어 버립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게 이 대목에서 드러나요.

리라 한 대로 끝난 화해, 그리고 새로 얻은 자리

몸으로 제압하는 방법이 막히자, 헤르메스는 대신 자신이 그날 아침 만든 리라를 꺼내 연주합니다.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아폴론은 조금 전까지의 분노를 잊어버려요.

두 신은 여기서 물건을 맞바꿉니다. 헤르메스는 리라를 아폴론에게 건네고, 아폴론은 그 대가로 반짝이는 채찍을 주며 그를 가축 떼를 지키는 자리에 앉힙니다. 여기에 더해 아폴론은 가지 셋 달린 황금 지팡이를 선물하고, 점을 치는 세 자매(트리아이)의 존재를 알려주면서도 진짜 예언 능력만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었어요. 둘은 이 자리에서 서로 우정을 맹세합니다.

이 화해 이후 헤르메스의 자리는 크게 넓어져요. 제우스는 그에게 새와 사자, 멧돼지와 개, 그리고 온갖 가축 떼에 대한 권한까지 인정해주었고, 헤르메스는 이후 자기 몫으로 갈대피리(시링크스)도 따로 만들어 갖습니다. 소를 훔친 사고뭉치가 하루 만에 전령이자 가축의 수호자, 그리고 상거래와 나그네를 지키는 신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에요.

오디세이아 5권, 칼립소에게 전한 제우스의 명령

찬가 속 장난꾸러기 이미지와 달리,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헤르메스는 전혀 다른 얼굴로 등장합니다. 5권에서 제우스는 그에게 님프 칼립소를 찾아가 "가엾은 오디세우스를 이제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결정을 전하라고 지시해요.

명령을 받은 헤르메스는 바람처럼 땅과 바다를 날 수 있게 해주는 황금 샌들을 신고, 사람의 눈을 잠재우거나 깨우는 지팡이를 든 채 물수리처럼 바다를 스쳐 날아갑니다. 칼립소는 그를 반갑게 맞아들이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왔느냐고 묻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는 곧바로 얼굴빛이 바뀌었어요.

제우스의 결정을 전해 들은 칼립소는 격분합니다. 신들은 여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 유독 못마땅해한다며, 새벽의 여신이 오리온을 사랑했다가 결국 잃은 일과 데메테르가 이아시온을 사랑했다가 제우스의 벼락에 그를 잃은 일을 예로 듭니다. 자신은 그저 난파해 홀로 떠밀려 온 오디세우스를 거두었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해요.

헤르메스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명령을 거역하면 뒤따를 결과를 분명히 경고합니다. 결국 칼립소는 마지못해 뜻을 굽히고, 나중에 오디세우스에게 스스로 그를 보내주겠다며 뗏목과 식량, 순풍까지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해요. 이 장면에서 헤르메스가 한 일은 설득이 아니라, 신들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관철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디세이아 10권, 키르케의 집 앞에서 만난 낯선 청년

헤르메스는 10권에서 다시 한번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나요. 이번 무대는 마녀 키르케의 저택으로 이어지는 숲길입니다. 헤르메스는 수염이 막 나기 시작한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변장해 오디세우스를 가로막아요.

그는 먼저 상황부터 알려줍니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이미 키르케의 손에 돼지우리에 갇혀 멧돼지 신세가 되어 있다고요. 다만 몸만 바뀌었을 뿐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부하들은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됐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헤르메스는 여기서 검은 뿌리에 우유처럼 하얀 꽃이 피는 약초 하나를 건넵니다. 신들은 이 풀을 몰리라 부르며, 사람의 손으로는 뽑아낼 수 없지만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설명해요. 그러고는 구체적인 대응법을 일러줍니다. 키르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법을 걸려 할 때, 겁먹지 말고 마치 죽일 듯이 칼을 뽑아 달려들라는 것이었어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이상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반드시 받아내라고도 당부합니다. 이 맹세 없이 방심하면, 그녀가 오디세우스를 발가벗긴 뒤 아무 쓸모 없는 처지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경고였어요. 몰리를 먹고 이 지시대로 움직인 오디세우스는 결국 부하들과 달리 키르케의 마법에 걸리지 않고 맞설 수 있었습니다.

형제도 자녀도 하나로 못 박히지 않는 이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폴론을 비롯한 제우스의 다른 자녀들과 이복형제 관계로 묶일 수 있어요. 고전 사전류의 기록을 보면 이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헤르메스가 맡은 역할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옛사람들 중에는 아예 헤르메스라는 이름의 신이 여럿 있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어요. 키케로는 다섯을, 세르비우스는 넷을 구분해 기록했을 정도입니다.

자녀 쪽 사정도 비슷해요. 헤르메스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는 각각 별도로 다뤄질 만큼 갈래가 많고, 어느 한 목록이 정본으로 굳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헤르메스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는 하나의 확정된 가계도보다, 여러 전승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점을 알아두는 편이 더 정확해요.

이 신을 더 알고 싶다면

여기서 다룬 세 장면, 그러니까 태어난 날의 소 도둑질과 화해, 칼립소에게 전한 명령, 키르케 앞에서의 조언은 각각 다른 작품에 흩어져 있어요. 호메로스 찬가 4권의 익살스러운 헤르메스와 오디세이아의 신중한 헤르메스를 한 인물로 이어서 보려면, 원전을 직접 따라 읽는 쪽이 가장 정확합니다.

오디세이아 속 두 장면을 앞뒤 맥락과 함께 원문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민음사에서 나온 오뒷세이아(김기영 역)가 5권과 10권을 포함한 작품 전체를 완역으로 담고 있어 도움이 됩니다.

오뒷세이아 표지관련 도서 추천오뒷세이아원작 완역본 책 보러 가기 →

호메로스 찬가처럼 오디세이아 바깥에 흩어진 헤르메스의 탄생과 계보까지 함께 살펴보고 싶다면, 해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현대지성)가 이런 개별 신화들을 한데 모아 소개하는 구성이라 참고할 만해요.

해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 표지관련 도서 추천해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이 책 자세히 보기 →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는 인물들

헤르메스가 몰리로 도운 상대, 마녀 키르케의 사연은 키르케 신화 정리에서 더 볼 수 있어요. 제우스의 명령을 전달받고 결국 오디세우스를 놓아준 칼립소 신화 정리도 이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아버지 제우스가 어떤 신인지는 제우스 신화에서, 소를 도둑맞았다가 리라 한 대로 화해한 상대 아폴론의 이야기는 아폴론 신화에서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